2005년 초겨울 무렵이었다. 강북에 있는 4.19탑에서 나는 평소 친하게 지내는 아리따운 여인으로부터 신문지에 쌓인 어떤 덩어리 하나를 받았다. 펼쳐보니 어른 주먹크기만한 도자기였다. 도자기는 불에 그슬린 듯 엷은 밤색 또는 살색을 띄고 있었고, 그 생김새는 잘 익어 이제 막 벌어지기 시작한 석류 모양이었다. 그녀는 도자기를 선물로 주면서 경기도 곤지암에 있는 유명한 도공이 직접 구운 것이라고 했다. 도자기에 찻물을 담기도 하고 연적으로도 쓸 수 있지만 실제로 사용하진 말고 보관해 두고 감상하라고 했다. 시큰둥하게 받아든 도자기를 살펴보니 일반 도자기와 달리 겉 표면이 꺼끌꺼끌 했다. 매끈매끈한 도자기만 보다가 표면이 거친 도자기를 보니 좀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내가 평소에 도자기나 미술품에 많은 관심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그런 물건을 탐내거나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도자기가 구워지는 과정을 듣게 되면서, 난 어떤 운명적인 시 한편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했다. 그녀의 자태고운 도자기 칭찬 일색에도, 내 관심은 도자기가 아닌 소나무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녀가 말해주는 이 도자기가 탄생한 과정은 이렇다.
까다로운 도공은 흰빛이 나는 흙이 구해지지 않으면 도자기를 빚지 않는다. 따라서 이 도자기는 원래 흰빛의 흙으로 만든 것이다. 그런 흙은 특정 장소에만 존재하는 한정된 흙이라서 전국 어디에서도 구하기가 쉽지 않은 흙이다. 이런 흙으로 도자기를 빚을 때 도공은 보통의 도자기 작업과 달리 흙의 겉 표면에 유약을 바르지 않고 도자기 안에만 유약을 바른다. 표면에 유약을 바르지 않는 이유는 순전히 불의 무늬를 새겨 넣기 위함이다. 삼일밤낮 가마에서 불을 때면 자연스럽게 불의 무늬가 도자기 표면에 그려진다. 따라서 도자기의 무늬는 도공도 예측이 불가능 하며, 이는 전적으로 불의 기운과 나무의 입김에 달려 있다. 이런 과정의 작업이다 보니 불의 기운이 매우 중요하게 되고 땔감을 위해 도공은 곧게 뻗은 최소 30년 이상 된 소나무만을 가마에 넣는다. 천오백 도를 넘나들며 무섭게 타오르는 불가마 안에서 석류 모양을 지니고 들어간 흙덩어리는 소나무의 불기운이 많이 닿은 곳은 그렇지 않은 곳보다 더 짙은 빛을 띄게 되며 자연스런 불의 무늬가 생겨나게 된다. 또한 본래 흙 안에 포함되어 있던 작은 규소조각들은 강렬한 열에 녹아 금빛으로 더욱 반짝이게 된다.
흰 살결과 작은 몸집을 가진 그녀가 도자기에 대한 설명을 다 끝내기도 전에, 나는 소나무의 일생에 대해 꽤 구체적인 상상을 하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엔 좋지만 소나무의 삶 역시 우리들 생애만큼이나 평안치 않았을 것이다. 일반 잡목들이 세파에 시달리며 쉽게 휘어지기도 하고 힘에 부칠 때 곁가지도 내며 타협하며 살아간다면, 그는 곧게 자라 오르기 위해 땅 속 바위를 붙들고 버텼을 것이다. 온 몸을 뒤흔드는 폭풍에 실뿌리 여린 손가락 발가락엔 피가 배어났을 것이다. 또 어떤 때는 이파리를 매달고 가지를 뻗기 위해 저절로 굽어지는 제 몸을 들숨으로 멈추며 수도승처럼 견뎌냈을 것이다. 이는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에서 만적의 마지막 숨통이 끊어질 때 자신도 모르게 등이 굽고 입이 벌어진 것과 같은 느낌으로 오버랩 시킬 수 있다. 무수한 세파를 겪으면서도 스스로를 지켜낸 소나무는 곧게 뻗어 훌륭한 자태를 가진 나무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바른 기상으로 인해 소나무는 곧 누군가의 손에 의해 베어지게 되고, 소나무의 피눈물 나는 한과 참고 참아온 시간은 그대로 묻혀지게 되나 싶었다.
소나무의 몸은 도공의 가마에서 토막 나 불 붙여졌다. 소나무는 가마 안에서 자유로운 불과 영혼이 되었다. 전생에 참고 참았던 서러움과 갈 곳 없던 욕망들은 가마 안에 놓여 있는 한 덩이 흙을 그냥 두지 않았다. 일생동안 숨겨왔던 본능과 욕망이 흙의 표면에 다녀갔다. 삼일밤낮 흙을 할퀴어대다가 제풀에 지친 소나무는 마침내 자기 자신이 그 곳으로 들어가 눕는다.
나무를 받아내는 작은 흙덩이도 예사롭지 않다. 순백의 종이 같았던 저 여리고 작은 흙덩이는 소나무의 슬픔을 마치 알기라도 한 듯 소나무의 무례하고 모질고 거친 행동을 온 몸으로 다 받아내 준다. 소나무가 한 덩이 흙의 표면에 자신의 전 생애를 쏟아내고 식어갈 무렵 흙은 어느덧 소나무들이 금빛으로 군락을 이룰 수 있도록, 한 덩이 흙에 불과했던 제 몸의 주인인 영혼이 될 수 있도록 자리를 내주고 있다.
나는 위와 같은 소나무의 서러운 생애를 생각하며, 내가 소나무가 되어 자동기술법에 의존해 시를 써내려 가는데 나도 모르게 눈에서 한 두 방울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 역시 부모와 떨어져 살며 청소년기에 탈선할 시간이 여러 번 있었으며, 그 유혹을 떨쳐내기 위해 적지 않은 시간 나도 나 자신을 돌아다보았지만 매번 나는 무너져 내렸다. 소나무 껍질처럼 질긴 시간을 붙들고 방황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소나무가 내가 되고 내가 소나무로 쉽게 동화되어 저절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진 것이었다. 내가 비록 시작기간이 짧고 작품도 그리 많진 않지만 시를 받아내다가 눈물이 저절로 굴러 내린 시는 이 「소나무 찻잔」이 유일하다.
이런 소나무 찻잔이다 보니 물을 붓자마자 바로 끓어오를 수밖에 없다. 그 뜨거움은 내 손으로 건너와 내게 세상살이의 불립문자 가르침을 전해준다. 마치 만적이 소신공양을 위해 곡기를 끊고 대중들 앞에서 불타오르며 교외별전을 전했듯이 말이다. 소나무처럼 바르고 뜨겁게, 혹은 다소 억울한 일이 있더라도 감내하고 살다보면, 나도 언젠가 저런 금빛 사리를 얻게 될는지 누가 아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졸시를 세상에 발표한 후, 지금도 지나가다 곧게 뻗은 소나무를 보면 소나무가 내게 꾸벅 인사를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마치 자신의 숨겨진 아픔을 달래주어 고맙다고, 이심전심 너와 나는 서로 마음이 통한다고 염화미소 같은 표정으로 목례를 해오는 즐거운 착각에 빠져든다.
도공이 이 도자기에 붙였던 원래 이름은 ‘청자상감 무슨무슨 매병’인가 하였다고 하는데 나는 내 마음대로 ‘소나무 찻잔’이란 이름을 지어 놓고 있다.
하지만 이 도자기가 구워지는 과정을 듣게 되면서, 난 어떤 운명적인 시 한편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했다. 그녀의 자태고운 도자기 칭찬 일색에도, 내 관심은 도자기가 아닌 소나무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녀가 말해주는 이 도자기가 탄생한 과정은 이렇다.
까다로운 도공은 흰빛이 나는 흙이 구해지지 않으면 도자기를 빚지 않는다. 따라서 이 도자기는 원래 흰빛의 흙으로 만든 것이다. 그런 흙은 특정 장소에만 존재하는 한정된 흙이라서 전국 어디에서도 구하기가 쉽지 않은 흙이다. 이런 흙으로 도자기를 빚을 때 도공은 보통의 도자기 작업과 달리 흙의 겉 표면에 유약을 바르지 않고 도자기 안에만 유약을 바른다. 표면에 유약을 바르지 않는 이유는 순전히 불의 무늬를 새겨 넣기 위함이다. 삼일밤낮 가마에서 불을 때면 자연스럽게 불의 무늬가 도자기 표면에 그려진다. 따라서 도자기의 무늬는 도공도 예측이 불가능 하며, 이는 전적으로 불의 기운과 나무의 입김에 달려 있다. 이런 과정의 작업이다 보니 불의 기운이 매우 중요하게 되고 땔감을 위해 도공은 곧게 뻗은 최소 30년 이상 된 소나무만을 가마에 넣는다. 천오백 도를 넘나들며 무섭게 타오르는 불가마 안에서 석류 모양을 지니고 들어간 흙덩어리는 소나무의 불기운이 많이 닿은 곳은 그렇지 않은 곳보다 더 짙은 빛을 띄게 되며 자연스런 불의 무늬가 생겨나게 된다. 또한 본래 흙 안에 포함되어 있던 작은 규소조각들은 강렬한 열에 녹아 금빛으로 더욱 반짝이게 된다.
안으로 유약이 발리고 겉은 고스란히 흙인 채로 구워진 찻잔 하나를 본다 찻잔의 표면에 점점이 박힌 금빛 반점들은 마치 바닷바람에 맞서던 해송(海松)들처럼 군락을 이루고 있다
금빛의 그 화려한 문양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불이 할퀴고 간 흔적이 보인다 몸부림 친 불의 뿌리가 보인다
이파리를 매달고 가지를 뻗으면서도 굽어지는 제 몸을 들숨으로 멈춘 나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가마 안에서 나무는 한 덩이 흙의 표면에 무엇을 애써 새겨 넣으려 했었던 것일까 아무도 몰래 얼마나 많은 나무와 뿌리와 시간과 불의 혀가 흙의 둘레에 왔다가 갔었던 것일까
찻잔 안에 물을 따르자 순식간에 물이 끓어오른다 불과 뿌리로 움켜쥐었을 소나무의 땅 속 피묻은 자리가 내 손바닥을 통해 뜨겁게 전해져 온다
「소나무 찻잔」 전문
금빛의 그 화려한 문양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불이 할퀴고 간 흔적이 보인다 몸부림 친 불의 뿌리가 보인다
이파리를 매달고 가지를 뻗으면서도 굽어지는 제 몸을 들숨으로 멈춘 나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가마 안에서 나무는 한 덩이 흙의 표면에 무엇을 애써 새겨 넣으려 했었던 것일까 아무도 몰래 얼마나 많은 나무와 뿌리와 시간과 불의 혀가 흙의 둘레에 왔다가 갔었던 것일까
찻잔 안에 물을 따르자 순식간에 물이 끓어오른다 불과 뿌리로 움켜쥐었을 소나무의 땅 속 피묻은 자리가 내 손바닥을 통해 뜨겁게 전해져 온다
「소나무 찻잔」 전문
흰 살결과 작은 몸집을 가진 그녀가 도자기에 대한 설명을 다 끝내기도 전에, 나는 소나무의 일생에 대해 꽤 구체적인 상상을 하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엔 좋지만 소나무의 삶 역시 우리들 생애만큼이나 평안치 않았을 것이다. 일반 잡목들이 세파에 시달리며 쉽게 휘어지기도 하고 힘에 부칠 때 곁가지도 내며 타협하며 살아간다면, 그는 곧게 자라 오르기 위해 땅 속 바위를 붙들고 버텼을 것이다. 온 몸을 뒤흔드는 폭풍에 실뿌리 여린 손가락 발가락엔 피가 배어났을 것이다. 또 어떤 때는 이파리를 매달고 가지를 뻗기 위해 저절로 굽어지는 제 몸을 들숨으로 멈추며 수도승처럼 견뎌냈을 것이다. 이는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에서 만적의 마지막 숨통이 끊어질 때 자신도 모르게 등이 굽고 입이 벌어진 것과 같은 느낌으로 오버랩 시킬 수 있다. 무수한 세파를 겪으면서도 스스로를 지켜낸 소나무는 곧게 뻗어 훌륭한 자태를 가진 나무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바른 기상으로 인해 소나무는 곧 누군가의 손에 의해 베어지게 되고, 소나무의 피눈물 나는 한과 참고 참아온 시간은 그대로 묻혀지게 되나 싶었다.
소나무의 몸은 도공의 가마에서 토막 나 불 붙여졌다. 소나무는 가마 안에서 자유로운 불과 영혼이 되었다. 전생에 참고 참았던 서러움과 갈 곳 없던 욕망들은 가마 안에 놓여 있는 한 덩이 흙을 그냥 두지 않았다. 일생동안 숨겨왔던 본능과 욕망이 흙의 표면에 다녀갔다. 삼일밤낮 흙을 할퀴어대다가 제풀에 지친 소나무는 마침내 자기 자신이 그 곳으로 들어가 눕는다.
나무를 받아내는 작은 흙덩이도 예사롭지 않다. 순백의 종이 같았던 저 여리고 작은 흙덩이는 소나무의 슬픔을 마치 알기라도 한 듯 소나무의 무례하고 모질고 거친 행동을 온 몸으로 다 받아내 준다. 소나무가 한 덩이 흙의 표면에 자신의 전 생애를 쏟아내고 식어갈 무렵 흙은 어느덧 소나무들이 금빛으로 군락을 이룰 수 있도록, 한 덩이 흙에 불과했던 제 몸의 주인인 영혼이 될 수 있도록 자리를 내주고 있다.
나는 위와 같은 소나무의 서러운 생애를 생각하며, 내가 소나무가 되어 자동기술법에 의존해 시를 써내려 가는데 나도 모르게 눈에서 한 두 방울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 역시 부모와 떨어져 살며 청소년기에 탈선할 시간이 여러 번 있었으며, 그 유혹을 떨쳐내기 위해 적지 않은 시간 나도 나 자신을 돌아다보았지만 매번 나는 무너져 내렸다. 소나무 껍질처럼 질긴 시간을 붙들고 방황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소나무가 내가 되고 내가 소나무로 쉽게 동화되어 저절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진 것이었다. 내가 비록 시작기간이 짧고 작품도 그리 많진 않지만 시를 받아내다가 눈물이 저절로 굴러 내린 시는 이 「소나무 찻잔」이 유일하다.
이런 소나무 찻잔이다 보니 물을 붓자마자 바로 끓어오를 수밖에 없다. 그 뜨거움은 내 손으로 건너와 내게 세상살이의 불립문자 가르침을 전해준다. 마치 만적이 소신공양을 위해 곡기를 끊고 대중들 앞에서 불타오르며 교외별전을 전했듯이 말이다. 소나무처럼 바르고 뜨겁게, 혹은 다소 억울한 일이 있더라도 감내하고 살다보면, 나도 언젠가 저런 금빛 사리를 얻게 될는지 누가 아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졸시를 세상에 발표한 후, 지금도 지나가다 곧게 뻗은 소나무를 보면 소나무가 내게 꾸벅 인사를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마치 자신의 숨겨진 아픔을 달래주어 고맙다고, 이심전심 너와 나는 서로 마음이 통한다고 염화미소 같은 표정으로 목례를 해오는 즐거운 착각에 빠져든다.
도공이 이 도자기에 붙였던 원래 이름은 ‘청자상감 무슨무슨 매병’인가 하였다고 하는데 나는 내 마음대로 ‘소나무 찻잔’이란 이름을 지어 놓고 있다.
안녕하세요. LM팀 양해기 과장입니다. 저는 전국 40여개 빌딩의 사무실 임대 관련 업무를 담당합니다. 회사 업무 외에 저는 시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200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했지요. |